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피 프리데리케 (문단 편집) === 반론 === 사실 조피와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엘리자베트 황후]](시씨)의 고부갈등은 좀 사연이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시씨는 조피의 조카로 피가 이어진 가까운 친척이었으며 거기다 조피는 자신의 아들에게 열렬한 사랑의 기쁨을 느끼도록 해준 이 어린 조카에 대해 처음에는 그래도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당장 자신이 정략결혼으로 마음고생을 했기에 아들의 감정에 의외로 많은 가치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결혼 준비 과정에서도 콧대 높은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시씨를 얕잡아 보지 않도록 혼수도 보충해주고 이런저런 필요사항들을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물론 시씨가 조피를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꺼렸던 것은 확실하지만 최근에는 일기나 편지 등, 당시 기록들을 살펴볼 때 정작 조피는 시씨에 대해 그렇게까지 안 좋게 보지는 않았다는 분석들 또한 대두되는 분위기다.[* [[소르본 대학교]] 교수인 장 폴 블레드의 견해도 이쪽에 가깝다.] 또 시씨가 본격적으로 자녀들의 양육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 계기는 장녀 조피의 요절이었는데, 이건 당장 조피 대공비가 말렸는데도 본인이 외국까지 어린 아이를 데려갔다가 사달이 난 것이다. 루돌프가 받은 혹독한 군대식 교육은 문제가 많았지만 이건 조피 이전에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지시에 따라 실시된 교육이었다. 루돌프의 예민하고 섬세한 기질을 제일 우려했던 건 다름 아닌 부친인 프란츠 요제프였고 조피 대공비는 고생하는 어린 손자를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전통적인 보수적 관점에서 황족 남성은 강건한 군인형 인간으로 키워야 한다는 아들의 생각을 지지했던 것 정도에 가깝다. 즉, 주범은 황제고 조피는 종범 정도. 어쨌든 조피 대공비는 그나마 이 특수하고 탈 많은 대가족에서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이고 생활을 챙기며 가족들 중 어른의 역할을 수행했던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래서 시씨를 제외한 다른 자녀들과 며느리, 손주들도 이러한 조피를 대개 잘 따랐다. 특히 시씨의 차녀 [[기젤라 루이제 마리|기젤라]]는 손녀를 세심히 관찰한 조피가 그녀의 성향과 잘 맞는 교육방식을 적용해 안정적으로 잘 자랐던 케이스. 나중에 시집 온 셋째 며느리 [[마리아 테레자|마리 테레제 대공비]][* 삼남 [[카를 루트비히(1833)|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세번째 아내.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비롯한 나이차이도 얼마 안나는 의붓자녀들을 친자식처럼 아껴준 것으로 유명하다.]가 이런 종류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했지만 그녀는 감히 프란츠 요제프와 시씨의 자녀들을 챙길 만한 연령과 서열은 아니었다. 결국 자녀의 상태에 진지한 관심을 갖는 어른이 가족 내에 부재한 상황에서 마이어링의 비극이 터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피 사후 그녀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꽤 안타까운 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